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청학련 사건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[include(틀: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)] 1972년 10월 [[박정희]]는 장기집권을 위해서 전격적으로 [[계엄령]]을 선포하고 [[10월 유신]]이라는 [[친위 쿠데타]]를 결행하였다. 반(反)유신체제 움직임은 여기저기서 나타났지만 총칼을 앞세운 공포 분위기에 그 어느 누구도 쉽사리 나서지 못하였다. 1973년 8월 [[김대중 납치 사건]]으로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받으면서 반(反)유신체제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. 1973년 9월에는 대학교 개강과 더불어 대학생들[* 여기서 주도했던 대학생들은 유인태(현 국회의원), 이철(전 국회의원), 나병식 등이었다.]의 저항운동은 점차 반독재·반체제 슬로건까지 내걸게 되었고 이게 사회 각계각층으로 퍼져나갔다. 여기에 [[장준하]], [[백기완]], [[함석헌]], [[지학순]], [[윤보선]] 등등 지식인·종교인과 야당 인사들은 민주헌정의 회복 및 박정희 유신정권의 인권탄압을 격렬히 규탄하면서 개헌운동을 위한 '100만인 개헌서명운동'에 들어갔다. 1974년 1월 8일 박정희 정권은 반유신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[[긴급조치]] 1, 2호를 각각 공포하여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시켰다. 하지만 대학생들의 저항은 지하신문 발행, 동맹휴학 등 음성적인 방법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었으며 나아가 계속해서 지식인들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비밀리에 개헌서명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